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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⑥] 국민타자 이승엽

'국민 타자' '라이언킹' '합법적 병역 브로커'. 야구에 크게 관심 없는 팬들도 한 번쯤은 들었을 법한 별명의 주인공은, 이승엽(46)이다. 일간스포츠는 KBO리그 출범 40주년을 맞아 포지션별 최고의 선수를 선정하고 있다. 20대부터 50대 이상까지 세대별 야구인 10명씩 총 40명이 투표에 참여한 가운데, 이승엽을 올스타 1루수로 선택한 이는 무려 37명이다. 이승엽은 이번 투표에서 야수 전체 득표율 1위(92.5%)를 차지했다. 이승엽이 '최고의 1루수'라는 평가에는 이견이 거의 없었던 셈이다. 2020년 신인상을 받은 KT 위즈 우완 투수 소형준은 "고민하지 않고 선택했다"고 말했다. NC 다이노스 이용찬은 "몰표가 나올 것 같다”고 했다. 이승엽은 어릴 적부터 야구를 좋아했다. 아버지 이춘광씨가 "생일 선물로 갖고 싶은 게 뭐냐"고 묻자 이승엽은 "동네 형들이랑 야구 하고 싶다. 방망이와 글러브를 사달라"고 했다. 이승엽은 집 안이든 앞마당이든 장소를 가리지 않고 늘 혼자 공을 던지며 놀았다. 동네 유리창을 자주 깨트려 변상하곤 했다. 이승엽도 "공부보다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며 웃었다. 우연히 야구에 입문했다. 동덕초등학교에 다닐 때 대구 지역 멀리 던지기 대회에서 입상했다. 이를 눈여겨본 중앙초등학교 신용승 선생이 야구 입문을 권유했다. 이승엽은 정규 수업을 마치면 집에 책가방만 던져 놓고 중앙초등학교로 달려갔다. 공을 던지고, 배트를 휘두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막내아들의 운동을 반대했다. '꼬마 이승엽'은 물러서지 않고 단식 투쟁까지 했다. 결국 아버지의 허락을 받았다. "포기하지 않고 야구만 열심히 하겠다"고 약속한 뒤였다. 이승엽은 경상중학교 재학 당시 투수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경북고 재학 시절에는 우수 투수상도 받았다. 그의 야구 인생은 1995년 삼성 라이온즈 입단 후 바뀌었다. 투수로 계약했으나, 입단 기자회견 뒤 팔꿈치 수술을 받았고, 구단의 권유에 따라 타자로 전향했다. 이승엽은 어릴 적부터 '왼손 박철순'을 꿈꿨고, "타자는 취미"라고 여겼다. "과연 내가 타자로 잘 될 수 있을까" "1년만 시한부로 해볼까" 하는 마음마저 내심 품고 있었다. 진로를 바꾼 이승엽은 누구보다 강한 야구 열정과 노력으로 최고의 반열에 올라섰다. 1990년대 후반 타이론 우즈(OB 베어스)와 펼친 '홈런왕' 경쟁은 그를 '국민타자'로 만들었다. 2002년에는 양준혁, 마해영과 중심 타선을 이뤄 삼성의 숙원이던 한국시리즈 우승 한을 풀었다. 2003년에는 역대 한 시즌 최다 홈런(56개)을 작성하며 전 구장에 '잠자리채' 열풍을 몰고 왔다. 이승엽은 미국 메이저리그(MLB) 일본 프로야구 진출 갈림길에서 2004년 지바 롯데 마린스에 입단했다. 2006년 일본 최고 명문 팀 요미우리로 이적해 구단 역사상 70대 4번 타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2012년 삼성으로 복귀한 뒤 2017시즌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KBO리그 최초 '은퇴 투어'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이승엽은 일본에서 8년(2004~2011년)이나 뛰었음에도 KBO리그 각종 최다 기록을 갖고 있다. 최다 홈런(467개), 타점(1498개), 득점(1355개), 루타(4077개), 2루타(464개)를 기록했다. 이 외에도 '최연소' '최고령' '최소 경기' 등등 수식어가 줄 잇는다. 한·일 통산 홈런은 무려 626개(일본 159개)에 이른다. 이종열 SBS스포츠 해설위원은 "아시아 홈런왕 출신 아닌가. 야구는 홈런을 때려줘야 제맛인데, 프로야구 최고의 홈런타자는 이승엽"이라고 평가했다. 이동욱 NC 감독은 "기록이 독보적"이라고 표현했고, 정경배 SSG 랜더스 타격코치는 "성적을 보면 너무 압도적이다. 600홈런 이상을 친 타자를 능가하는 선수가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조원우 전 롯데 감독도 "특별히 말할 것이 없다. 모든 기록을 다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승엽의 KBO리그 통산 성적은 1906경기 타율 0.302(2156안타). 홈런왕과 MVP(최우수선수)를 5회씩 수상했다. 골든글러브는 역대 최다인 10회 수상했다. 이승엽의 활약은 태극마크를 달고 있을 때 더욱 돋보였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3·4위전,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준결승전 등 '숙적' 일본을 만나 결정적인 홈런과 적시타를 터뜨렸다. 특히 베이징 올림픽 8회 역전 결승 2점 홈런을 때려내며 그동안의 부진과 부담을 떨쳐낸 뒤 눈물을 쏟은 장면은 여전히 회자하고 있다. 한국 야구에 '8회의 기적'이라는 단어를 선물하며, 역전 드라마를 썼다. SSG 최지훈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베이징 올림픽 영웅으로 기억한다. 누구나 떠올리는 '레전드'"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1루는 전 포지션을 통틀어 강타자가 가장 많이 포진해 있다. 그 가운데 이승엽은 '독보적' '압도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항상 최고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는 '더 잘하고 싶다'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했다. 양상문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은 "이승엽밖에 없다. 이대호도 있지만, 이승엽이 단연 역대 최고 1루수"라고 했다. 김경기 스포티비 해설위원은 "1루수는 경쟁자가 많은 포지션인데 그 정도 업적을 낸다는 게 압도적"이라고 했다. 이승엽과 마찬가지로 1루수 출신의 동갑내기 이호준 LG 타격코치는 "명실상부한 넘버원 타자"라고 인정했다. 이형석 기자 2022.01.1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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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절부터 은퇴까지…사진으로 보는 이승엽의 역사

"아버지, 야구만 시켜주시면 절대 애 안 먹일게요."초등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소년은 아버지를 조르고 또 졸랐다. 아버지는 반대했다. 단식 투쟁까지 했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게 열심히 하겠다"며 눈을 빛내는 소년의 진지한 모습에 아버지의 마음이 움직였다. 아들은 약속을 지켰다. 몇 년 뒤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홈런 타자도 성장했다.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역사를 썼다. 이승엽(41·삼성)이 현역에서 은퇴한다. 3일 대구 넥센전이 현역 유니폼을 입는 마지막 경기다. 한국 야구사에 한 획을 그은 '국민 타자'의 마지막 모습을 직접 보려는 팬들의 관심도 무척 뜨겁다. 은퇴 경기 입장권 2만4000장은 일찌감치 모두 팔렸다. 삼성의 사전 티켓 판매가 매진된 건 올 시즌 처음이다. 일간스포츠는 한국 야구 최고 타자 이승엽의 은퇴를 기념해 그의 발자취를 사진으로 돌아보기로 했다. 유년시절 사진은 이승엽의 아버지 이춘광(74)씨가 제공했다. 이 씨는 이승엽이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88년 대구 지역지에 실린 전국어린이야구대회 기사부터 삼성 시절까지의 기사를 꾸준히 스크랩했다. 스크랩 앨범만 서른 권이 넘는다. 이 씨가 모은 기사와 홈런공, 유니폼은 이승엽의 야구 역사이자 박물관이다. 유년시절의 이승엽, 가족과 뽀빠이 이상용씨가 진행한 어린이 프로에 참석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우측 최상단) 이승엽의 야구 열정은 어릴 적부터 남달랐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당시 이승엽은 여섯 살이었다. 당시 아버지가 "생일 선물로 갖고 싶은 게 없냐"고 묻자 그는 "동네 형들이랑 야구하고 싶다. 방망이와 글러브를 사달라"고 했다. 이춘광씨는 "그 후 승엽이가 동네 유리창을 자주 깨트려 변상하곤 했다"고 회상했다. 이승엽은 집 안이든 앞 마당이든 장소를 가리지 않고 늘 혼자 공을 던지며 놀았다. 이승엽은 "공부보다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며 웃었다. 동덕초등학교 4학년 재학 시절. 이승엽은 대구 지역 멀리 던지기 대회에서 입상했다. 이를 눈여겨 본 중앙초등학교 신용승 선생이 야구 입문을 권유했다. 이승엽은 정규수업을 마치면 집에 책가방만 던져 놓고 중앙초등학교로 달려갔다. 야구를 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결국 아버지와 기 싸움 끝에서 승리했다.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야구만 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허락을 받았다. 이춘광씨는 "마치 가둬 놓은 동물이 제 우리 문을 열어준 것처럼 좋아하더라"고 떠올렸다. '국민 타자'의 재능은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경상중학교 재학 당시 투수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경북고 재학 시절이던 1993년에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우수 투수상을 수상했다. 1994년에는 청소년 국가 대표로 선발돼 투타에서 고른 활약을 펼치며 한국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초등학교 시절 자택에서 섀도 피칭을 하는 이승엽 (우측 최상단) 그의 야구 인생은 1995년 삼성 입단과 동시에 바뀌었다. 이승엽은 늘 "타자는 취미"라고 생각했다. 투수가 하고 싶었다. '왼손 박철순'을 꿈꿨다. 하지만 구단의 권유에 타자로 전향했다. 입단 기자회견을 하고 며칠 뒤에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이승엽은 그때만 해도 "과연 내가 타자로 잘 될 수 있을까" "1년만 시한부로 할까" 하는 마음도 내심 품었다. 기우였다. 이승엽은 천재였다. 게다가 야구 열정과 노력도 남들보다 한 수 위였다. 곧 결과로 나타났다. 외국인 타자 타이론 우즈(전 OB 베어스)와 한국 프로야구 역대 가장 뜨거운 홈런왕 경쟁을 펼쳤다. 그가 꼽는 최고 라이벌 중 한 명이 우즈였다. 이승엽은 1998년 홈런 38개를 때려 내 42개를 기록한 우즈에 졌다. 하지만 이듬해 홈런 54개로 첫 홈런왕에 올랐다. 2001~2003년에도 3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했다. 특히 2003년에는 56홈런으로 아시아 개인 한 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을 작성했다. 야구장에 '잠자리채 열풍'을 몰고왔다. 이승엽의 홈런 공을 잡으려는 야구팬들이 잠자리채를 들고 전국의 야구장 외야석을 메웠다. 이승엽은 "1998년에는 22살의 어린 나이였다. 내 자신을 못 이겼다. 하지만 스스로를 넘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며 "1998년 비록 홈런왕에 실패했지만 그때 경험으로 노하우가 쌓였다. 훗날 성장에 큰 도움이 됐다"고 떠올렸다. 2002년에는 양준혁, 마해영과 중심 타선을 이뤄 삼성의 오랜 숙원이던 한국시리즈 우승 한을 풀었다. 당시 LG와 한국시리즈 6차전은 구단 역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였다. 삼성은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앞섰지만 6차전 8회까지 3점 차로 뒤져 패색이 짙었다. 그러나 9회말 다름 아닌 이승엽이 극적인 동점 3점 홈런를 작렬했다. 이후 마해영의 결승 홈런까지 나와 삼성은 창단 첫 우승을 확정했다. 이승엽 스스로가 꼽는 홈런 베스트5 가운데 하나다. 이승엽은 이후 국위선양에 앞장섰다. 2004년 일본 지바 롯데에 입단한 그는 2006년부터 일본 최고 명문팀 요미우리에서 뛰었다. '요미우리 70대 4번 타자'라는 타이틀도 달았다. 자부심이 컸다. 이뿐 아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등 굵직한 국제대회에선 고비마다 극적인 홈런을 터트리며 '해결사'로 이름을 날렸다. 한국 야구에 '8회의 기적'이라는 단어를 선물한 타자가 바로 이승엽이다. 그래도 그는 늘 "다른 선수들이 다 밥상을 차려 놓았을 뿐이다. 대표팀 전원이 모두 잘해서 우승한 것이다"며 "후배들이 더 많이 고생했는데 나 혼자 부각이 돼서 항상 미안하다"고 스스로를 낮췄다. 지금은 전설이 된 장면. 2008 베이징올림픽 한일전서 승부를 가르는 투런홈런을 때려 낸 뒤양팔을 들어 올리며 1루를 돌고 있다.2012년 일본에서 돌아온 후 이승엽은 다시 '전설'의 행보를 이어 가기 시작했다. 역대 개인 통산 최다 홈런(465개), 최다 타점(1495개), 최다 득점(1351개), 최다 루타(4066개), 최다 2루타(464개) 기록을 모두 갈아 치웠다. 2003년 세계 최연소 300홈런에 이어 2014년에는 역대 최고령 3할-30홈런-100타점 기록도 세웠다. 통산 최다 기록은 물론 최연소·최고령을 비롯한 전인미답의 기록을 여럿 갖고 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이승엽은 늘 강했다. 이승엽은 2014년부터 은퇴 시기를 마음 속에 정해 놓았다. 2017년을 마지막 시즌으로 여겼다. 결심을 행동으로 옮겼다. 보기 드문 '예고 은퇴'를 실행했고, 전 구단 선수단과 팬의 작별 인사 속에 '은퇴 투어'도 진행했다. 향후 진로는 아직 미정이다. 다만 당분간은 '야구 선수' 이승엽이 아닌 '아빠' 이승엽으로 지낼 예정이다. 그는 "선수로는 80~90점을 줄 수 있는데 남편, 아빠로는 50점도 안 된다"며 "아내(이송정씨)를 보면 항상 안쓰럽다. 자기 시간도 없이 애들 뒷바라지를 한다. 은퇴 후엔 분명히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빠가 될 것이다"고 다짐했다. ①2011시즌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 소속의 박찬호(왼쪽)와 이승엽. 박찬호가 메이저리그 커리어를 마친 뒤 공교롭게 이승엽과 한솥밥을 먹게 됐다.②1990년대 후반 삼성 신예 시절의 이승엽. 삼성의 플로리다 베로비치 전지훈련에서 LA 다저스 코치와 사진 촬영을 했다.③이춘광씨는 이승엽의 정신적 지주이자 ‘이승엽 기록관’ 지킴이이기도 하다. 자택에 모아 놓은 이승엽 관련 기념구를 들어보이며 활짝 웃고 있다.④이승엽의 유니폼 배번. 이승엽의 역사이자, 시대를 가로 지은대타자의 기록이다.역사적인 이승엽의 선수 생활에 가장 큰 박수를 보내는 사람은 바로 아버지 이춘광씨다. 이승엽은 3년 전 본지와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야구장을 찾는 게 가장 큰 취미다. 요즘 들어 '내 아들 자랑스럽다' '잘했다'는 말씀을 많이 해주신다"고 기뻐했다. 이씨는 "승엽이가 '후회하시지 않게 열심히 하겠다'는 약속을 지켜줘 정말 고맙다"고 했다. 이형석 기자 lee.hyeongseok@joins.com 2017.10.02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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